구부러진 길 위에서 보기
윤원화_독립기획자
우리는 곡선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래프로 그려진 숫자들의 행렬, 완만하게 굴곡진 풍경, 동식물의 부드러운 몸, 매끄럽게 다듬어진 산업 생산품,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대부분 평면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곡선은 시각적 특성으로 지각된다. 감자 껍질을 벗기거나 호수 공원을 산책하는 일이 무언가 둥근 것의 이미지로 기억되지는 않듯이, 손과 발을 움직여 곡선을 따라가는 경험이 그에 상응하는 인상을 남기는 경우는 드물다. 춤을 배우면서 곡선적 움직임을 연습할 때처럼 둥근 모양에 의식적으로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면, 곡선은 부피도 질량도 없는 유려한 선으로 우리 눈앞에 떠오른다. 그렇지만 나선, 유선형, 물결 무늬, 당초문 같은 곡선 모양은 모두 특정하게 휘어진 물체를 본뜬 것이다. 물리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몸이 굽는다. 그 구부러진윤곽을 볼 수 있는 것은 곡선 바깥에 있는 자다. 곡선을 따라 흐르는 힘과 그 형태를 동시에 감각하기는 어렵다.
임지현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드러운 곡면은 이러한 힘의 흐름에서 유래한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인 “아치 모션(arch motion)”은 장대높이뛰기선수가 가로대를 넘을 때 몸을 활처럼 구부리는 동작을 가리킨다. 이는 조금이라도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당겨진 몸의 모양이라는 점에서 하중을지지하고 분산하기 위한 건축물의 아치 구조와는 구별된다. 물론 곡면을 물질적으로 구현하려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적절한 구조 설계를 해야 하며, 실제로 전시물들은 여러 번의 재료 역학적 실험을 거친 결과다. 작가가 사용하는 도자나 집성목 같은 재료는 강도가 약해서 크기가 커지면 자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형태를 잡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전시된 사물들은 아무 힘도 받지 않는 그래픽 패턴처럼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는 서로 상충하는 자연스러움의 추구가 인위적으로 겹쳐 있다. 한편에는 관람자가 도시 환경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산업화된 추상의 익숙함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가가 재료의 성질에 순응함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물질 본연의 조형성이 있다. 눈의 습관과 물질의 속성 사이에서, <아치 모션>의 전시작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볍고 팽팽한 몸짓을 꿈꾼다.
아치 형태에 대한 임지현의 탐구는 2015년부터 진행된 <둥근 것> 연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원래 도자의 고유한 매체적 성격을 형상화하려는 시도였다. 오랫동안 순수 미술의 매체로 군림해온 회화나 조각과 달리, 도자는 작가가 원하는 대로 색과 형태를 부과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흙과 물, 불과 공기를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지만 결과를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도자 특유의 역동성과 섬세함이 있다. 작가는 이를 변함없는 본질로부터 변화무쌍한 현상을 이끌어내는 자연의 조형적 풍부함과 연결 지었다. 무른 흙으로 빚은 형태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전통적인아치 구조와 고온의 화학 작용에 의한 독특한 색감을 살린 <둥근 것>의 도자 오브제는 부드러운 곡면들이 서로를 휘감은 듯한 형태를 취했다. 하나하나의 곡선은 풍화된 돌이나 동물의 살을 연상시키지만 그 얽힘은 무엇도 닮지 않은 이 구불구불한 덩어리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마구잡이로 구긴 것이 아니라 천천히구부리고 주의 깊게 다듬은 결과였다.
당시 작가는 구름이나 연기 같은 무정형의 현상을 참조하여 자연의 고요한 역동성 속에서 도자의 이미지를 갱신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연은 도자를 구성하는 절반일 뿐이다. 도자는 자연물을 인위적으로 정제, 조합, 가공하는 가장 오래된 합성물 제조 기술 중 하나로,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이미지의 상호작용을통해 순수한 자연이나 매체의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를 산출한다. 암석이 지하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변성되는 지질학적 과정과 달리, 도자 제작 과정은재료를 처리하는 손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정된다. 물질의 변성적 역량을 어떻게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낼 것인가? 이는 자연이 답해주지않는 도자의 문제이며 임지현의 지속적인 관심사다. 작가의 초기 작업이 도자에 집중하여 물질적 현상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2020년 이후에는 다양한 합성 재료를 실험하면서 시각과 물질, 문화와 자연의 교차에 대한 탐구를 확장하고 있다. 설령 어떤 곡선이 자연의 산물이더라도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유용하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다. 작가는 수목원과 식물원에서 살아 있는 자연물이 연구, 관리되는 방식을 조사하면서 인간의 시선과 물질의 생동성 사이의 간극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움직임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집성목과 도자를 이용한 최근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치 모션>은 상이한 재료와 이미지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관람자의 지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미세한 불일치의 공간으로 조성된다. 전시 전체에서 반복되는물결 무늬는 언뜻 보면 재료의 차이와 무관하게 일정한 형태를 부과하는 산업의 논리를 따르는 듯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각각의 재료들이 주어진 형태를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작가는 무너지기 쉬운 점토와 부러지기 쉬운 집성목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곡선의 유사성과 차이를 고려하면서 오브제의 형태를 잡고 공간을 구성했다. 두 재료는 대조적이지만 자연과 인공의 이미지가 절충적으로 섞여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이들은 합성수지처럼 완전한 인공물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돌이나 원목처럼 완전한 자연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한 양가성은 2021년 개인전 <눈 밖의 이미지>에서 좀 더 직설적으로 연출되었는데, 여기서 도자와 집성목 오브제는 각각 대리석 제품과 인테리어용 관엽 식물을 모사하며 가공된 자연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재료와 그것을 통해 구현되는 이미지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었지만 그 유사성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절을가로지른 결과였다. 작가는 이 간격을 합성 재료의 혼성성에 국한되지 않는 시각적 물체의 고유한 이중성과 연관 지었다. 사물의 내적 구성과 외양 사이에는불가피한 어긋남이 있다. 오늘날 이미지는 그 틈새를 타고 미끄러지며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매끄럽게 옮겨 다닌다. 이렇게 파도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물체를 만드는 느린 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눈 밖의 이미지>가 물질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사이에 가로놓인 어떤 심연을 열어 보였다면, <아치 모션>은 그 속에서 가능한 운동의 형태를 실험한다. 물체는 수동적으로 이미지를 떠받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역전된 지지체 또는 구름판 삼아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미지는 서로 무관해 보이던 물체들을 연합하여 재료에 잠재하는 시각성을 이끌어내고 눈과 손의 새로운 협업을 촉진할 수 있다. 이러한 기대는 영상 작업 <플리커링 오브젝트(Flickering Object)>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화면 속에는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시간이 병치되는데, 하나는 작가가 점토판의 형태를 잡고 유약을 혼합하는 도자 작업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촬영된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이미지를 불러내는 연상의 연쇄다. 작업 중인 재료가 무엇이 될 것인가는 미확정이다. 통상적으로 작가는 재료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작업 과정을 통제한다. 그러나영상 속에서 흙을 만지는 손을 견인하는 것은 눈앞에서 엉기고 또 흩어지는 물질의 상태와 그것이 상기시키는 또 다른 물질적 풍경들이다. 작가는 이미지 검색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에 종속되지 않는 물질과 이미지의 자율적인 상호작용을 실험한다. 목적지 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길은 어디로 향할까? 하지만 좀 더 정확한 질문은 이 구부러진 길 위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 적 없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 있을까? 전시는 이 질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두고 관람자를 기다린다.(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