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또는 전시의 기능
김정현_미술비평가
폭설이 내린 새해 벽두 오픈한 임지현의 개인전 《눈 밖의 이미지》에서 ‘빙하’를 지시하는 작업 한 점(<Reproduced Glacier>(2020))이 자연 현상으로서의 눈을 연상케 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전시를 보러가는 길의 ‘수고로움’이라는 차원에서 전시는 바깥 풍경과 어울려 보였다. 도자, 판재, 사진을 이용한 세 가지 작업이 모두 범상치 않게 수고롭게 빚어졌으며, 그 수고로움과 이미지가 배반하면서도 협력하는 관계야말로 이 전시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도자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조각과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는 도자의 기본 재료가 되는 흙과 다양한 재료의 집요한 실험에서 출발하여, 질료를 추상적이거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형상의 원료가 되는 질료의 조작과 그것의 인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Image Transition’이라는 부제 또는 영문 제목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좀 더 명백하게 설명해준다. “흙의 물성에 반하지 않고 형상을 만들어”가는 지난 작업의 물질적인 화두를 넘어 창작과 관람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물질적 전환에 대한 관심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각 재료의 물성에 관습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형상을 부여하는 것보다, 그것의 ‘이미지’, 때로 부자연스럽지만 관습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감각을 다시 환기한다.
<집성목 이미지 오브제 모음>(2021)과 <대리석 이미지 오브제 모음>(2021)은 각각 판재와 도자를 재료로 집성목과 대리석의 이미지를 모방한다. 집성목과 대리석은 가구나 건축 자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생활공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 광범위한 사용은 곧바로 광범위한 열화된 복제로 이어져 ‘무늬’만 남긴 프린트가 가성비를 장점으로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이로 인해 물질과 그것의 이미지 사이의 감각이 교란되며, 이미지가 실제 사물의 존재감을 압도하는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원본과 복제의 감각적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집성목 이미지 오브제 모음>은 집성목을 겹쳐붙이고 자르고 구부리는 수작업을 거쳐 질료를 그것의 원천이 된 자연의 형상으로 빚어낸다.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으로 삼자는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은 전시 공간의 건축적 요소인 집성목 계단을 좌대 삼아 어우러짐으로써 나무의 인공적 조형과, 나무의 인공적 가공을 거쳐 다시 나무로 형상화한 작업을 대비시켜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자연에 거리감을 유발한다. 목대를 이용해 줄기나 가지보다 나뭇잎을 조형한 어긋남도 한 몫 한다. 물론 집성목을 가공하는 일은 집성목 장판을 다루는 일에 비할 바 없이 까다롭다. 그러나 수고는 관객의 몫이 아니다. 관객은 전시장을 한가롭게 거닐며 기껏해야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이미지를 담을 뿐이다.
기계 부품이나 건축적 구조처럼 바닥에 나열되거나 종종 벽에 매달린 <대리석 이미지 오브제 모음>은 관람자의 걸음걸이를 조심스럽게 한다. 미감과 강도를 만족시키는 대리석에 비해 도자는 깨지기 쉽다. 대리석 무늬를 입고 그 이미지를 모사해도 물질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도자는 조형이 훨씬 편리해서 물결모양, 작고 가는 아치형 구조, 막대나 브라켓 등의 기계부품 형태로 빚은 조각 유닛이 산업 자재 마냥 무심하게 펼쳐진다. 한편 대리석의 무늬가 자연적으로 생기는 데 반해 도자의 무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다. 대리석의 무늬가 이물질의 화학 작용의 산물이라면 도자는 다양한 색상의 흙이 층을 이뤄 대리석 무늬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때 ‘대리석 이미지’를 모방한 도자가 마치 대리석과 대리석 시트지의 관계마냥 원본의 열화된 모방의 위상에 그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닮았다’는 것은 선후 관계가 있더라도 종종 위계 구조를 피해간다. 작가의 관심은 집성목이나 대리석 소비 취향의 경제적 변용에 규범적인 미적 평가를 내리는 것보다, 매체를 이동하고 그에 따라 어떤 감각과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데 있는 듯하다. 대리석과 대리석 시트지와 대리석을 모방한 도자 조각을 볼 때의 감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대리석 도자의 위상은 대리석과 대리석 시트지 중 어느 쪽에 더 가깝게 기울어 있는가. 대리석 도자 조각을 찍은 사진을 추가해서 비교해 본다면 어떤가. 이러한 질문들은 어느 한 가지를 판가름해내기는커녕 그러한 판가름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다만 사물과 이미지가 꼬리를 문 끊임없는 감각적 연쇄작용의 와중에 물리적인 공간에 놓인 물리적인 사물로서의 예술이 정박시키는 질문의 추를 가늠해보도록 한다.
임지현은 여섯 점의 ‘사진-오브제’를 통해 이미지로의 전환 또는 이미지의 전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이 아니라 사진-오브제라 칭한 이유는 개별 작업이 <Naked Eye>(2021) 한 점을 제외하고는 트레이싱지나 색유리와 같은 다른 재료와 혼합되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Fine-Scaled> #1과 #2는 포말과 균열과 녹색 계열의 비정형 지대로 구성된 사진을 바탕으로, 그 중 희끗한 부분을 마찬가지로 비정형의 나무줄기나 연기와 같이 윤곽이 복잡하고 날카롭게 잘려나간 트레이싱지가 덮고 있다. 여기서 듬성하게 들뜬 트레이싱지를 눌러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던 투명 유리 액자는 <Quick-Slow-Spontaneous Selection Tool> #1과 #2에서 잿빛과 푸른 계열의 색유리로 바뀌며 사진 바탕 위에 색면이라는 또 하나의 레이어를 추가하게 된다. 도자나 판재를 수공예적으로 다루는 데 비해 사진과 색유리 등의 사용은 기계적 공정을 거친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트레이싱지를 세심하게 오려낸 수작업이 먼저 눈에 띄지만, 작가의 설명으로 밝혀질 작업 공정에 비하면 놀라운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일련의 사진 이미지는 디지털 툴로 구축한 가상의 이미지도, 기성 사물의 이미지도 아닌, 오직 이 작업을 위해 작가가 만든 도자 부조의 일부를 마이크로 렌즈로 촬영한 것이다. 게다가 염료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는 식물을 통째로 세척 건조 후 화면에 부착하여 흙과 식물이 가마의 열에 반응하여 도출된 색과 질감을 포착해낸다. 이렇게 도자 매체의 본격적인 재료 실험이 효과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결과물이 그것만으로 완결된 작품이 되지 않고, 그렇게 구축한 넓은 표면 중 극히 일부가 사진으로 채취되고 디지털 및 아날로그로 보정되어 작품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사진은 대상을 과잉 재현하기도, 과소 재현하기도 하지만, 대상과 사진 사이의 잉여로운 낭비가 이렇게 극대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대상-작업의 물질적 실체와 물리적 공정의 전모가 전시에서 아쉬울 만큼 은닉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다니엘 뷔랭이 「스튜디오의 기능」(1979)에서 작가의 스튜디오를 작품이 속하는 단 하나의 공간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스튜디오에 남아있을 사진의 대상이야말로 작품이 왜곡되지 않은 진정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임지현에게 작품이 온전히 속하는 공간은 전시장일 것이다. 그 온전함이란 원본성이나 작품이 최초로 속한 공간의 환경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에서 사진으로의 매체 전환 및 양자의 분리 또는 한편의 은폐를 통한 다른 한편의 홀로 드러남을 기준으로 한다. 또한 물질적인 대상에서 비물질적 이미지로의 전환은 작가의 특정 작업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관람 행위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관객은 작품의 현전을 목전에 두고 침잠하는 대신, 산책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스쳐지나가며 전시장 이후의 사후 관람을 준비하듯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렇게 나온 전시와 작품의 이미지는 소셜네트워크의 압도적인 시각 문화의 작은 흐름을 형성하며 점점 더 미술의 물질성과 신체성을 잠식할 듯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시의 온전한 물리적 감상에 대비하여 전시의 이미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현상을 가치 평가하는 시선은 여전히 엿보이지 않는다.
‘이미지 오브제 모음’과 관람자의 휴대폰 사진첩 사이의 브릿지로서 사진-오브제가 놓임으로써, 이제 작품의 공간이 스튜디오와 전시장을 넘어, 관객용 촬영 스튜디오를 겸하게 된 전시장에서 찍힌 사진 이미지로 확장된 것을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작품의 개념적 운동의 항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스튜디오, 전시장, 관객의 사진첩. 그 중 어디가 작품의 온전한 공간인지는 말할 수 없다. 전시의 추가된 기능이 “스크린 밖의 물질을 이미지를 보듯, 제한된 상태로 감각하는 것이 아닌 다른 감각적 심상으로의 이행”을 모색하려는 작가의 ‘눈 밖의 이미지’ 사고와 감각을 추동한다는 사실을 주시할 뿐이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