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형태의 횡단면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선영(미술평론가)
공중에 어슷하게 걸려 공간을 얇게 베어낸 것 같은 형태는 그 형태만큼이나 변화무쌍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흙을 판판하게 하여 종이처럼 잘라붙여 만든 형태는 색도 어두워서 그림자와의 경계도 무너뜨리려 한다. 마치 공간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전시 공간에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망은 그 곳에 들어설 관객의 그림자는 물론이거니와 투명 실에 메달린 형태와 상호작용한다. 임지현의 작품은 흙으로 빚어 구워낸 작품에 기대될 법한, 중력에 순응하는 안정된 형태를 배반한다. 어디가 입구인지 알 수 없는 그 복잡한 형태들로 무엇인가를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부를 비워 낸 선적 형태라 할지라도 무게가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2013)를 비롯한 임지현의 최근 작품들은 바닥보다는 공중에서 진면목을 발휘한다. 여러 개로 나뉜 부분들이 연결되어 뭉글뭉글 올라가는 작품 [연기]는 많은 주름과 꼬임과 구멍이 있는 괴물같은 형태가 특징적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그러한 형태의 단면같다. 형태가 복잡하니 단면도 복잡하다. 임지현은 자신의 작품이 3D프린터로 절대 복제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둥글게 모인 것들](2015)처럼 바닥에 놓여있는 작품들은 마치 씨앗이나 배, 또는 초기단계의 생물체처럼, 앞으로 발생될 형태를 내부에 접어 넣은 듯한 잠재성으로 충만하다. 자연의 외피가 아니라 자연의 운동을 표현해왔던 임지현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운동하는 형태를 일순간 잘라낸 듯한 구조적 단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간이면서도 지속을 내장한다. 지속은 이 작품의 장에 들어선 관객들의 지각에서도 발생한다. 이때의 지각은 시선만이 아니라 전신의 체험을 포괄한다. 그것들은 한순간 멈춰있지만 생물체가 살아가기 위해 물질과 에너지가 들고나던 기관들의 단면처럼 유기적이며 구조적이다. 그러나 그림자들을 포함한 균열적인 형태는 한눈에 파악되는 총체성은 결여한다. 총체적 질서 대신에 단편들의 집합이 야기하는 불확실성이 있다.
생명은 불투명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가시성의 장에 자신을 드러낸다. 빛과 공기 등을 통과시키는 단면 사이에는 분비물같은 것이 끼어있어 단순한 기계적 구조가 아니라, 생물형태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생물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크로스 섹션을 하듯이 그렇게 어떤 시공간의 절개면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임지현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담는 형태나 어떤 배경 안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그자체가 공간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간을 변화시킨다. 자연의 한 면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이 반영된 작품들은 여러 단위들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유닛 아닌 듯한 유닛들은 이리저리 연결되어 확장성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허(虛)의 공간을 적극 품어낸다. 그래서 작품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장(場)이 된다. 작가에게는 흙 자체가 변화 과정 중의 매체로 다루어진다. 흙의 물성은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선, 색, 면과 가까울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시된 작품은 도자기라기보다는 조각, 그것도 회화에 가까운 날렵한 형태이다. 선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 이번 작품은 공간에 그려진 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학부시절부터 그릇을 만들기보다는 흙으로 도판을 만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던 습관이 회화적 특징을 낳았을 것이다. 부분마다 다르게 발해지는 색 또한 회화적이다. 이 미묘한 색채는 갑발소성이라는 전통 가마기법의 결과이다. 갑발소성의 방법을 응용하여 자연물을 직접 흙 위에 안착시킨다. 자연물은 가마에서 연소될 때 고유의 색과 흔적을 남긴다. 흙에다가 자연물을 넣으면 그 둘의 만남으로 특유의 색과 질감이 나온다. 작가는 나무껍질, 열매 씨앗, 왕겨, 미역, 바나나 껍질, 쌀 등 식물성 자연물을 마치 물감처럼 사용한다. 여기에서 흙과 불은 자연의 여러 차원을 융합하는 역할을 한다. 여러 요소가 복합된 자연에는 구멍들이 많이 나 있다.
복잡한 내부의 동공들은 쉽게 재현/복사되지 않으며, 입체적인 미로처럼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굴곡들과 기이한 단면을 생성한다. 굴속에는 또 다른 굴이 있고, 길은 끝없이 갈라진다. 입구와 출구는 불확실하고 끝없는 이어짐만 예시된다. 공백이 형태를 만들고 표피가 내부를 만든다. 그것들에는 바닥이 없으며 쌓아올릴 수도 없다. 임지현의 작품은 같은 형태와 색을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다는 점에서 철저히 일회적이다. 이러한 일회성은 특정 생물의 종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발생과 진화같은 움직임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예술의 출발은 자연이며, 그 자연은 살아 있는 것이다. 복잡미묘한 색과 형태는 자연적 재료를 썼다는 것 뿐 아니라, 자연의 방식을 따른다. 건축가가 벌집을 연구하듯이, 작품으로 제대로 서있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 또한 자연을 참조한다. 이러한 사고는 고전적이다.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자연세계는 운동하는 물체(body)들의 세계였다고 말한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운동 자체는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자연세계는 스스로 운동하는 사물들의 세계, 즉 자발적인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이다. 자연 그자체가 과정이고 성장이며 변화이다. 이런 과정이 발전이다. 임지현의 작품 속에 이리저리 뚫린 구멍들은 끝없이 흐르는 만물을 위한 통로같다. 물론 자연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고전주의 시대 뿐 아니라, 정보가 지배하는 현대에도 설득력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살아있는 체계처럼 ‘에너지와 정보의 여러 흐름이 들고나는 발신자 겸 수신자’(미셀 세르)이다. 이리저리 꼬인 통로가 있는 임지현의 작품은 그 자체가 운동의 흔적이며, 운동을 구조화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허물처럼 탈피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선으로 어슷하게 걸린 작품은 복잡하게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구멍의 단면들만큼이나 운동감을 준다. 작가는 흙이라는 유동적인 재료를 최대한 유동적인 형태로 고착시킨다.
그것은 결국 단단한 고체로 귀결되지만 유동성을 내포한다. [연기]는 이러한 유동성의 극점에 있다. 유동성이라는 공통의 코드로 인해 연기는 용트림하는 생물체를 닮았고, 생물체는 자유롭게 운동하는 원소들같다. 거기에는 고체와 액체와 기체가 서로 순환하는 관계이듯이 꼬리를 무는 운동성이 있다. 양이 질로, 질이 양으로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분리해서 생각하는 독단적 패러다임은 상대화된다. 공중에 어슷하게 걸린 설치 작품은 에너지가 흘러서 만들어진 지형도를 보여준다. 미셀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말하듯이, 에너지는 지형도를 그리고 지형도에 길을 내며 지형도에 깃든다. 임지현의 작품에서 자연적 형태는 에너지의 형태로 현존한다. 이러한 에너지의 묶음이 약호이고 체계이다. 흙과 자연물 그리고 불을 만나게 하는 도예 또한 그렇다. 작가는 과정의 역동성을 고정하는데 주력한다. 자연의 역동성과 복잡함은 만져질 듯한 구체성을 띄어야 하는 것이다. 공중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 같은 작품 [연기]는 복잡한 난류를 닮았다.
난류가 시작되면 교란은 폭발적으로 커진다. 미셀 세르는 [해명]에서 연기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피어오르면서 가속되다가 임계속도를 지나면 여러 갈래로 쪼개져 거친 소용돌이가 된다고 묘사한다. 유체에는 소용돌이가 생기고 그 속에 더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게 되며, 그 각각은 유체 에너지를 소멸시키면서 독특한 리듬을 만든다는 것이다. 임지현의 작품은 이러한 리듬의 형태화이다. 소용돌이에 대한 비유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다원론과 다형성에 기반한 생명철학’(미셀 세르)을 보여준다. 자연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예술과 만난다. 작가는 자연의 피상적인 재현이 아니라, 자연과의 동형적인 원리를 찾으려 한다. 그리고 이 원리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변주한다. 임지현의 작품 속에서 많이 발견되는 수많은 주름들은 그러한 변주의 흔적들이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소용돌이의 연속체는 미로이며, 그것은 직선에 의해 표상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언제나 직선은 곡률로 뒤섞여 있다.
그에 의하면 변동을 주름으로 만들고, 주름 또는 변동을 무한으로 실어 나르는 변곡은 언제나 있다. ‘주조(鑄造)하는 것은 한정된 방식으로 변조하는 것이며, 변조하는 것은 영원히 변화하면서 연속적인 방식으로 주조하는 것’(들뢰즈)이라면, 임지현의 작품은 변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조는 공간에 그려지는 선같은 회화적인 방식으로 더욱 날렵하게 진행된다. 그것은 중력을 거슬러 사방팔방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은 어느 순간--확장이 어떤 임계점에 이르면 죽음이 될 수 있다-까지는 약동하는 생명의 역량을 보여준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두발이 더 안정적이며 속도를 낼 수 있듯이, 재현으로부터 탈주하는 선은 속도감 있는 움직임 속에서만 안정적이다. 임지현은 자신의 작품에는 바닥이 없다고 한다. 바닥은 처음부터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선택될 뿐이다. 그녀의 작품은 마지막 지점에 처음이 있다. 흙에서 자기로의 변형을 시작으로 변형은 끝없이 일어난다.(2016)